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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목소리 星の声

Mahler Symphony No.5 - 말러의 다섯번째 교향곡

by Fred.Park 2014. 7. 18.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의 말러 교향곡 5번

 

말러는 유독 '죽음'에 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인 작곡가였다. 말년엔 걸음걸이 하나하나까지 신경쓸 정도로 자신의 건강 상태에 집착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9번 교향곡의 원본 악필에도 죽음을 암시하는 말러의 메모가 적혀있을 정도였다. 이 5번 교향곡 역시 1악장의 부제는 '장송행진곡'(Trauermarsch)이다. 딱 처음 막 들었을땐 트럼펫 수석이 먼저 멘델스존의 작품 <한 여름밤의 꿈> 중中 결혼 행진곡을 시작하는듯 연주를 하지만, 무심하게 그 기대를 깨버리고 장례식 팡파르를 울리기 시작한다. 뭔가 부족한 듯한 반음. 뭔가 불안함을 주는 그런 반음의 트럼펫 소리로.

말러는 음악 속에 자신의 삶 혹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것을 그 어느 작곡가들 보다 '강한 어조로' 그려낸 사람이다. 1악장에서 무언가에 대한 '분노' 또는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말러 자신의 생각'을 녹여냈다면, 2악장 '격렬하게'(Stürmisch)라 붙은 부제에 맞게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격렬한 운궁으로 시작된다. 말러가 표현한대로 "삶의 가운데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격정적인 연주는 끊이지 않는다. 계속 '죽음', 그리고 그것에 쫓겨 괴로워하며 우왕좌왕하는 말러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말미에 들어 음악의 분위기는 조금씩 밝아진다. 이내 금관악기들의 '코랄'이 시작된다. 격렬한 비가 내린 뒤 먹구름이 사라지고 조금씩 햇빛이 비춰지는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코랄'도 이내 불협화음과 반음씩 떨어지는 동기로써 천천히 추락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이게 끝이 아니다.

3악장 스케르쪼(Scherzo)에서부터는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진다. 건강문제로 '지옥'에 간것 처럼 괴로워하며 '죽음'에 대해 깊은 고민과 공포에 빠졌던 말러가 조금씩 광명을 향해 나가는 순간일 것이다. 도입부는 스케르쪼(Scherzo)의 뜻인 '해학곡', 즉 가락이 경쾌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기분 을 나타내는 기악곡답게 시작한다. 프렌치 호른의  시작하며, 경쾌한 춤곡이 계속된다. 그러나 마냥 밝거나 경쾌하지만은 않다. 무언가 어정쩡하다. 무언가 불안정하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경쾌한 춤곡과 불안감이 반복, 교차된다. 3악장을 작곡하던 시기까지는 아마도 말러는 천당과 지옥 중간에서 방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악장에서와 같이 말러의 어록 중 "삶의 가운데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는 말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4악장은 그 유명한 '아다지에토'(Adagietto)다. 말러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모두 대단하지 않은것이 없으나, 5번 교향곡 4악장은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삽입되기도 했고, 최근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 삽입되어 더더욱 유명해진 4악장은 목관, 금관, 타악기가 전혀 연주되지 않고 오직 현악5부와 하프만이 연주된다. 매우 잔잔하며 깊은 감동을 준다. 이를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알마(말러의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의 고백"으로 해석하며, 실제 이 작품이 작곡될 시기를 생각하면 그 해석은 무리가 아닐 수 있다. 2악장까지 '죽음'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고민에 깊이 잠긴 모습을 보였다면, 3악장부터는 조금씩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말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말러에게는 '운명의 여인'이자 '불멸의 연인'인 알마를 만났다. 이제 여기서 말러는 알마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십시오. 현악5부와 하프는 그렇게 나즈막이 속삭인다.

* 다만 4악장 말미엔 말러 자신이 작곡한 가곡들 중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의 동기가 낮은 음 부분에 깔려 들리는 것은 약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사랑을 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던가? 이런 감미로운 곡에, 말러 자신도 “이것이 바로 나의 분신”이라며 유독 애착을 보였던 교향곡 5번 4악장에 어째서 그런 슬픈 노래가 들어가있는진 누구도 작곡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5악장은 드디어 환희를 느낀 말러의 모습이 보인다. 드디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빠져나와 '삶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간 말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나는 말러의 음악을 감상할 때엔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곧 말러 자신이란 생각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의 음악을 정면으로 대할 수 없고,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저명한 음악평론가들의 저작을 통해 도움을 받으며 말러의 음악을 이해해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에서 이해한 것일 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모든 파토스pathos를 작품에 녹여낸 말러의 음악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3악장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어둠과 광명, 불안함과 행복이 대칭 구조를 이룬 음악 작품으로 오늘 하루 쉬어야 할 숨을 모두 다 쉬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깐 동안의 죽음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4악장 아다지에토 한번 더 듣고 자야 하겠다.

"The symphony must be like the world; it must embrace everything." (Gustav Mahler, 1860-1911)
말러 부부가 산책하는 모습

 

2022. 7. 19. 비문, 중언부언 많았던 글을 이제서야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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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개정 전 글을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문과 중언부언, 읽기 힘든 조악함을 모두 갖췄으나, 이것 마저도 모두 나의 기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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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 말러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 물론 평소에도 자주, 많이 듣지만... - 다른 사람들은 자기전엔 잔잔한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잠들기 전에 들어도 잠만 잘 자는 사람이니 말이다. 말러 1번교향곡을 듣다가도 4악장의 시끄러운 도입부를 들으면서도 잠만 잘 자는 사람이니 말이다. 무튼! 졸리고 자고는 여기서 중요한게 아니다!

말러는 유독 '죽음'에 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인 작곡가였다. 말년에는 (50세의 나이로 비교적 일찍 운명했지만..) 걸음걸이수까지 신경쓸 정도로 건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가 남긴 마지막 9번 교향곡의 원본 악필에도 죽음을 암시하는 말러의 메모가 적혀있을 정도였다. (말러의 10번 교향곡은 미완성이다.) 이 5번 교향곡 역시 1악장의 부제는 '장송행진곡'(Trauermarsch)이다. 딱 처음 막 들었을땐 트럼펫 수석이 먼저 멘델스존의 작품 <한 여름밤의 꿈> 중中 결혼 행진곡을 시작하는듯 연주를 하지만, 무심하게 그 기대를 깨버리고 장례식 팡파르를 울리기 시작한다.

큰 틀에서 볼때 이 작품의 형식은 총 5악장으로 구성되었고, 전통적인 독일권 음악의 교향곡 4악장 구성과는 약간 다르다. 그러나 음악 그 자체는 '어두움, 혹은 분투에서 승리, 광명으로'라는 독일권 교향곡의 전형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파격과 전통의 공존이랄까. 그래서 그러한지 말러는 1악장에서 누군가의 '장송행진곡'을 울리며 장례식을 준비한다. 이것은 기존 음악에 대한 '파격'을 위함인지, 아니면 자신 또는 누군가의 장례식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말러가 5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시기엔 건강상 문제로 '지옥'을 겪기도 했지만, 묘령의 여인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와 결혼하면서 '천국'을 겪기도 한 시기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말러의 음악은 '유독' 자신의 삶 혹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것을 '강한 어조로' 그려냈다. 말러 자신신의 어록 "교향곡은 온 세상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를 충실히 지킨 셈이다. 장송행진곡의 1악장에서 무언가에 대한 '분노' 또는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말러 자신의 생각'을 녹여냈다면, 2악장 '격렬하게'(Stürmisch)라 붙은 부제 답게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시작된다. 말러가 표현한대로 "삶의 가운데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라는 말 처럼 격렬한 연주는 계속된다. 잠시 잠잠해질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격렬하다'. 계속 '죽음', 그리고 그에 쫓겨 괴로워하며 우왕좌왕하는 말러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역시 사람이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말러의 말처럼 우리 삶의 가운데에도 죽음이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언제 어느때서든 인지하고 산다면 우리도 2악장처럼 항상 격렬한 감정의 폭풍우에 쫓겨 불안해하며 살지 않을까. 하지만 말미에 들어 조금씩 밝아지며 금관악기들의 '코랄'이 시작된다. 격렬한 비가 내린뒤에 먹구름이 사라지고 조금씩 햇빛이 비춰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 <스타워즈>의 메인 테마곡처럼, 혹은 개선장군의 행진곡처럼 '승리자'의 느낌을 준다 해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말러의 대선배 베토벤의 9번 교향곡 4악장처럼 '환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코랄'도 이내 불협화음과 반음씩 떨어지는 동기로써 천천히 추락하게된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못먹게 된 느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게 되는' 허탈함을 안겨준다. 최근 내가 입버릇처럼 달고사는 '허망하다'는 느낌을 준다는게 더욱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2악장의 끝은 매우 점잖고 허망하게 끝이 난다.

3악장 스케르쪼(Scherzo)에서부터는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진다. 건강문제로 '지옥'에 간것 처럼 괴로워하며 '죽음'에 대해 깊은 고민과 공포에 빠졌던 말러가 조금씩 광명을 향해 나가는 순간일 것이다. 도입부는 스케르쪼(Scherzo)의 뜻인 '해학곡', 즉 가락이 경쾌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기분 을 나타내는 기악곡답게 시작한다. 프렌치 호른의 팡파르로 시작하며, 경쾌한 춤곡이 계속된다. 그러나 마냥 밝거나 경쾌하지만은 않다. 무언가 어정쩡하다. 무언가 불안정하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경쾌한 춤곡과 불안감이 반복, 교차된다. 3악장을 작곡하던 시기까지는 아마도 말러는 천당과 지옥 중간에서 방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악장에서와 같이 말러의 어록 중 "삶의 가운데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는 말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4악장은 그 유명한 '아다지에토'(Adagietto)이다. 말러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모두 대단하지 않은것이 없으나, 5번 교향곡 4악장은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라 할 수 있다.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삽입되어 더욱 유명한 4악장은 목관, 금관, 타악기가 전혀 연주되지 않고 오직 현악기로만 연주된다. 매우 잔잔하며 깊은 감동을 준다. 이를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알마(말러의 아내)에게 바치는 고백"으로 해석하며, 실제 이 작품이 작곡될 시기를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큰 무리가 아닐 수도 있다. 2악장까지 '죽음'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고민에 깊이 잠긴 모습을 보였다면, 3악장부터는 조금씩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말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말러에게는 '운명의 여인'이자 '불멸의 연인'인 알마를 만난것 같다. 이제 여기서 말러는 알마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 서론이 참 길었지만 4악장을 딱 네 글자로 정리하면 '감미롭다'. 

다만 4악장 말미엔 말러 자신이 작곡한 뤼케르트 가곡 중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가 낮은 음 부분에 깔린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런 감미로운 곡에, 말러 자신도 '이것은 바로 내 자신이다'라며 유독 애착을 보였던 4악장에 그런 슬픈 노래가 왜 들어가있는지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말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아니, 어쩌면 말러는 미래를 이미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말러와 알마와의 결혼생활은 비극으로 끝이 났으니 말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5악장은 지나치게 밝고 경쾌하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음악에 집어넣는 말러의 음악 특성상, 이는 알마의 마음을 얻게되어 느낀 기쁨을 그린것이라 보아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깊은 고민에서 빠져나와 '삶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간 말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성서의 한 구절인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 (욥기 8,7)가 그대로 이루어진것과 같은 느낌을 함께할 수 있다. 

항상 내가 말러의 음악을 느낄땐 내가 마치 말러가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말러의 음악을 모자란 내 지식과 아직 깊지 않은 연륜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평론가들의 책이나 문서등의 도움을 받으며 말러의 음악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그것들은 '나만의 말러'를 만드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녹여낸 작곡가들의 음악은, 특히 말러의 음악은 '공감'(sympathy) 그것도 '깊은 공감'을 가지지 않고서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다. 사실 아닌말로 만든 사람만이 작품의 의미를 100% 이해할 수 있지, 남이 어떻게 완벽하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통해 말러와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그것이 말러가 남긴 작품들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이유 그 자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러의 음악을 어떻게 느끼든, 어떤 평론가가 이러쿵 저러쿵 한다 하더라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