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첩보. 뭐 이런 이야기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단 복잡한 생각을 비우고 봐야 한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해외 출장을 간 남편(목소리 출연만, 오디기리 죠 분)은 주인공(우에노 주리 분)에게 키우고 있는 거북이 밥 잘 주고 있냐는 질문만 하지, 어떻게 잘 지내느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학창시절부터의 절친한 친구(아오이 유우 분)는 언제나 빛이 나는 삶을 사는 것 같고, '나'(주인공)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미묘한 감정.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보다는 오직 거북이 잘 먹고 있으냐 묻기만 하는 무미건조한 남편. 그래, 이러한 일상의 따분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하나 찾았다. 존재감 없이 사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은 어쩌다 '스파이'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따분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그들을 찾아간다.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앞서 말했듯, 어렵게 이 영화를 바라볼 필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 스파이, 첩보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지만, 어려운 첩보전, 심리전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그런' 라면이나 만드는 라멘집 아저씨(마츠시게 유타카 분) 부터, 모나카집 사장(나중에 변태, 게이로 은근히 밝혀지기도 한다.)과 두부집 사장. 우스꽝스러운 경찰들. (그 중 한명은 이부 마사토) 주인공에게 내려진 스파이로서의 지령은 오직 어떻게든 눈에 띠지 말고 조용히, 가만히, 얌전히 있으라는 것이었음에도, '스파이'가 되려 하니 오히려 남들 눈에 띨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묘한 일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
주인공을 비롯, 결국 스파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서로서로 알게 되지만 결국 주인공만 혼자 일상에 다시 남게 된다. 친구고 뭐고 남편이고 뭐고, 심지어 키우던 거북이까지 놔버리고 일상을 탈출하려 했던 주인공의 시도는 끝내 실패로 끝이 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영화의 마무리는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상쾌함'까지 느끼게 한다. 아무리 일상은 반복되는 듯 하고 따분할지라도 그것을 놓치게 되면 곤란할 만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이미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북이는 평상시엔 느릿느릿하다. 땅에서는 느릿느릿 걷는다. 그러나물에서는 다르다. 물에서는 인간보다 빠르다. 아무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북이와 같은 시시한 일상은, 아주 약간의 변주를 주면 '의외로 빠르게 헤엄'칠 수도 있다.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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