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들리 스콧 감독은 원조 글래디에이터 매니아들을 배신하지 않았다.24년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영화 감상이었다.
2. 매우 정교한 고증까지는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 그의 영화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고대 로마는, 정말 그 시대의 고대 로마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고대 로마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3. 전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전작을 요약, 정리 해준다. 간간이 전작의 씬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본편의 감상을 방해할 정도도 아니며, 본편을 이해하는데 전작을 잘 몰라도 괜찮을 정도로 편집하여 내놓았다 생각한다.
4. 전작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그대로 다시 등장한다. 루킬라 공주 역의 코니 닐슨, 원로원 의원인 그라쿠스 의원역을 맡은 데릭 제이코비가 그대로 등장한다. 루킬라 공주는 20여년의 세월(영화 속의 설정 상)이 흘러 자연스럽게 나이든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지만, 그라쿠스 의원은 애초부터 백발의 노인 분장을 한 설정이었기에 전작과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5. 그러므로 전작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작의 막시무스, 본작의 루시우스. 전작과 본작을 관통하는 루킬라 공주와 그라쿠스 의원. 전작에선 콤모두스 황제를 찔러 죽이려 했던 화살촉. 본작에선 아내와 어머니를 죽게 만든 화살의 꼬리. 막시무스와 루시우스의 비슷한 운명. 그러나 마지막 검투장에서 만난 다른 사람. 분노와 복수심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로마의 공화정을 향한 집념. 등.
- 여기에 다 늘어놓자 하면,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떠들 수도 있을법한 이야기들.
6. 고어함이 많이 늘었다. 이 영화를 돌비 시네마에서 감상했으니 내 몸안에서 아드레날린이 뿜뿜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일반 영화관에서 감상했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표현의 적나라함이 곧 영화의 훌륭함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놓고 사지가 잘리고 목이 달아나며 신체가 관통되는 모습이 전작에 비해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목의 동맥이 잘려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꼭 이런 방법으로만 부정부패에 스러져가는 로마제국의 야만성을 보여줄 필요는 있는가, 하는 의문 부호는 지금도 지우기 어렵다. 내가 지금 영화 <신세계>의 고대 로마 버전을 보고 있는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7. 전작에 비하면 '정치'에 관한 요소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라쿠스 의원, 아니 실제 역사속의 그라쿠스 형제가 어쩌구. 또 어떤 이가 실존인물이었고 아니고를 따지자는게 아니다. 특히 부유한 노예상이자 부패한 정치인, 끝내 문자 그대로 '미친' 황제를 등에 업고 집정관에까지 오르는 마크리누스까지. 전작에선 원로원 의원들과 황제 콤모두스간의 정치 다툼에 대한 모습이 덜 보였다면, 여기서는 황제와 원로원간의 긴장관계가 더욱 선명히 보인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리고 결국 루시우스의 마지막 검투는 로마의 관문에서 부패한 정치가이자 로마를 자신의 손으로 집어넣으려는 악한 집정관이자 노예장사꾼 마크리누스를 처단하는데서 끝이 난다.
7-1. 신파, 라기보단 감동적 요소가 많았기에 그건 참 좋았다. 루시우스는 결국 아버지 막시무스의 갑옷과 무기를 이어받아 들고 싸움에 나선다. 마크리누스는 혈통만으로 로마의 황제가 될 수 없고, 너의 꿈(로마 공화정의 부활)은 헛된것이라 비웃는다. 물에 빠진 루시우스를 자신의 칼로 무참히 찌르려 하지만, 막시무스의 갑옷은 루시우스를 지킨다. 20여년 전 콜로세움에서 쓰러진 아버지는 수호신이 되어 아들을 지켜준다. 그리고 결국 로마의 진정한 역적이자 부패한 정치가 마크리누스를 로마의 입구에서 처단한다. 아버지는 결국 검투장 콜로세움에서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으나, 루시우스는 끝내 살아남아 로마의 꿈을 이루자고 외친다.
7-2. 그러나 다시 콜로세움으로 돌아와 조용히 아버지 막시무스, 나를 도와달라 하는 모습에서 속된말로 짠- 함이 느껴졌다. 그 이후의 로마는 어떻게 되는걸까?
7-3. 글래디에이터 3의 각본 작업이 진행중이라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제 글래디에이터 시리즈는 딱 여기까지가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8. 리들리 스콧은 절대로 원조 매니아층을 배신하지 않았다. 엔딩곡은 역시 <Now We Are Free>. 말이 필요없다. 듣자. 명곡이다.
9. 정말 이 영화에 대해 밤새도록 떠들 자신이 있지만, 나는 글재주가 충실하지 못해 여기서 그만두도록 한다. 페르마가 그랬던 것 처럼 여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나도 멋들어진 영화 감상문이나 평론 써보고싶지만, 능력이 안되어 아쉬움만 느낀다.
- 번외 : 다른데선 잘도 라틴어로 써제끼더니만, 막시무스의 무덤 위엔 어째서 '현대 영어'가 새겨져있는 것이었을까? 하는... 그런데 무식한 아메리칸들을 위한 배려라 생각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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