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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뉴스 칼럼] 문득 떠오른 '1998년 오정구'를 그리다

by 이웃집박선생 2024. 11. 30.

사진 출처 : 부천문화원 홈페이지, 1980년대의 부천 오정구 지역 전경 (당시 부천 중구, 북부지역)

 

1998년 부천으로 전학을 왔다. 처음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끝내 나는 부천에서 차례로 초, 중, 고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부천에서 간간이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거나, 가볍게 동네 산책을 다니기도 한다.

처음 부천에 이사와 살게 된 동네는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이었다. 1998년의 여월동을 기억하는 분들은 잘 아실 터. 여월동 뿐 아니라 사실 오정구 지역이 그 당시만 해도 여전히 '시골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논과 밭이 있었고, 냇물이 있었고, 산과 들이 있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면서 뒷산에서 뻐꾸기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과학 과목 중, 생물 실습 등을 위해 어디 먼 곳을 갈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 별도의 교보재를 구입할 필요도 없었다. 학교 바로 옆 논에 가면 올챙이, 개구리, 소금쟁이부터 거머리에 심지어 물장군까지. 21세기, 밀레니엄 시대를 앞둔 그때에도 부천 오정구 지역엔 '시골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이 '시골스러움'이라 함은, 단순히 덜 개발된, 무언가 미개한, 무언가 불편한 생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비포장 도로를 자전거로 천방지축 다니다가 논에 빠져 옷을 다 버린 일도 있었고, 흙과 모래는 더 이상 말을 얹고 꾸미려 들 것 없이 나 너 우리와 '한 몸'이었으니.

이 '시골스러움'이라 함은, 실제로는 푸근함을 의미한다. 어른들은 우리가 흙과 모래, 그리고 논과 밭 주변에서 노는 것을 두고 '더럽다.'라고 하며 그러지 말라 말리셨지만, 우리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김대중 정부 시기, IMF 경제 위기 속에서도 인터넷과 컴퓨터의 보급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고, 그렇게 부천 오정지역은 옛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재미있는 동네가 되어갔다.

세월이 흘러, 우리가 개구리와 올챙이를 잡으러 갔던 논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세워졌다. 오래된 엔진소리 툴툴거리던 소신여객 버스가 무심하게 지나다니던 좁은 길은 이제는 널찍한 대로가 되었다. 작은 냇가는 메워지거나 복개되어 소리 없고 냄새 없고 자취 없이 사라졌다.

오래전 우리가 '미성주유소'라 부르던 곳은 이제 주유소의 흔적 비슷한 것조차 없어졌다. 오래전 우리가 특정 이름으로 부르던 장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원종사거리에도 언제나 들어오나, 하던 지하철이 정말로 들어섰다. 땅딸막하던 그야말로 옛날식 건물들은 신도시 못지않은 건설용 화학용제 냄새 풀풀 풍기는 신축 건물로 바뀌어간다.

더 나아가 이젠 수도권 서부 지역에 몇 남지 않은, 부천에서 몇 남지 않은 빈 캔버스 같았던 원종동, 고강동, 대장동 쪽에도 대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하고 추억하고, 또 실제 음미했던 그때, 그때의 부천, 특히 부천 오정의 모습은 더더욱 그 모습을 시간 뒤로 감출 것이다.

지금은 그저 '원종역'이라 불리는,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원종사거리'라 부르고, 예전 '오건아파트', '삼부아파트'라 불리던 곳 근처의 어느 주점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문득 수십 년 전, 부천 오정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로, 문득. 떠올랐다.

문득 떠오른 ‘1998년 오정구’를 그리다. < 칼럼 < 기사본문 - 부천뉴스

 

문득 떠오른 ‘1998년 오정구’를 그리다.

박홍찬 한의사 1998년 부천으로 전학을 왔다. 처음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끝내 나는 부천에서 차례로 초, 중, 고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부천에서 간간이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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