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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世の中

'텍스트 힙' 현상에 냉소 짓지 말아요,

by 이웃집박선생 2024. 11. 20.

별게 다 유행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유행이었다. 그러니 비웃을 필요 없다.

'텍스트 힙' 열풍을 비웃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더더욱 굳어지고 있다. 얼마전 경향신문에서도 지적한 바 있듯, '텍스트 힙' 현상은 오늘날 만의 현상이 아닌 인류가 문자를 만든, 즉 '유사'이래 언제나 그래온 현상이기 때문이다.

옛날엔, '책'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권력이자 부유함의 상징이었다. 글을 배우고 책을 읽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힘'이었다. 인쇄술의 발달 이전엔 필사를 통해 책을 생산할 수 밖에 없었다. 동서고금 공히 책을 소유하고 즐기는 이들은 극소수의 지식인들, 귀족, 부유층들이었다.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본인의 음악가로서의 실력도 출중했지만, 집에 '있어보이는' 고서 등을 모으느라 돈을 탕진하기도 했으며, 영화 <변호인>에서도 (실제 노무현 당시 변호사가 그랬는진 차치하더라도,) 변호사 사무실에 '있어보이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등의 전집류 책들을 본인 자리 뒤 책장에 두는 경우도 있었다. '책' 그 자체가 주는 '힘'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기에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한때 유행하던 유머집 '최불암 시리즈'에서도, '있어보이기' 위해 타임TIME 잡지를 들고 다니다가 이것을 타임이 아닌 '티메'라 읽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있었고, 당장 부모님께 듣기로도 그 세대에선 일단 영어나 일본어로 쓰여진 책 뭔가를 들고다니면 시쳇말로 '간지'가 철철 넘쳤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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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텍스트 힙' 현상은 오늘날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SNS와 겹쳐져서 뭔가 더 우스꽝스러워보일 순 있어도, 그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하나도 없다는 것.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도 당장 바로 읽을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책을 구입하여 집과 진료실에 "전시"(...)를 해두곤 한다.

내 스스로를 다독가라 부르긴 민망한 수준이지만, (글도 잘 못쓰지만, 언변도 좋지 않아 부족함이 많다.) 그래도 난 대한민국 30대 남성 평균에 비하면, 책 좀 읽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처럼 '그나마 쓸만한' 지능과 감성이 만들어진데엔 나의 어머니의 덕분이 컸다.

90년대 초중반이야 웅진, 금성출판사, 동아출판사(이후 두산동아가 됨), 예림당 - 등에서 아동, 청소년용 전집류 많이 팔아제끼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그런 전집류도 도움이 되었던건 사실이다. 다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위인전이건, 역사에 관한(개인적으로 웅진에서 나온 <한국의 역사> 만화 시리즈를 지금도 높게 평가한다.) 전집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거기서 파생되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어머니는 나의 이런 부분을 날카롭게 캐치하신 뒤, 당시 살던 집 근처의 신촌문고, 또는 간간이 광화문 교보문고로 나를 데려가 관심있는 책은 일단 두어권, 자유롭게 고르라 말씀하셨다. 혹은, 어머니 당신이 판단할 때, 내가 뭔가 관심을 가질만한 책이 있으면 슬쩍 사다가 내 책상에 그냥 두고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시거나. 절대로 남들 다 읽으니 너도 읽어야 한다. 독서를 잘 해야 사랑받는다는 식의 강요, 또는 권장 비슷한 것도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사다 주신 책들 중, 수 개월 동안 읽지 않고 그냥 두었던 것도 있었으나, 어머니는 별다른 말씀 일절 않으셨다. 화를 내거나, 돌려돌려 "왜 읽지 않니?"와 같은 물음 그 비슷한 것 조차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결국 나는 그 책을 읽게 된다.
핵심이다. 일단 손 닿는 곳에, 곁에 있으면 보게 된다. 어떻게든.
어찌되었든 쳐다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면 손을 대게 된다. 
그래서 요즈음의 '텍스트 힙' 현상을 비웃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강 선생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한강 선생의 작품을 포함해서 책 판매량이 늘었다는 것을 두고도 냉소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냉소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러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그래도 아예 안 쳐다보고 안 사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고.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일단 사서 곁에 두면, 언젠가는 본다구요.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 것 보다는 백 배 천 배 낫지 않은가...!!

2024/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