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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世の中

지각인생,

by 이웃집박선생 2024. 11. 27.

지각인생.

손석희가 지각인생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더란다. 생각해보면 나도 지각인생이다.

지금의 생업을 갖게 해준 대학은 세 번 입시를 치러 들어갔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평탄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지라, 한 번의 휴학과 한 번의 유급을 겪어, 두 학번 아래의 후배들과 같이 졸업을 했다. 국시에 합격하고, 졸업을 하고 면허증을 손에 집어드니 나이가 벌써 서른이다.

서른 즈음에 군대를 갔다. 그래도 한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어, 공중보건의사로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지만 이미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생활 한참 하는 내 친구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늦은 출발선이었다. 게다가 공중보건의는 3년 복무를 해야 한다. 복무를 마치고 이제서야 제대로 사회생활 하겠다 싶었는데, 나이가 벌써 서른 셋이다.

내 주변의 친구들 절반 정도는 벌써 혼사를 치르고 아이를 키우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잠깐 돌아서서 생각해보았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각각 스물 여덟, 스물 여섯에 결혼을 하시고 나를 낳으셨으니, 지금의 만 나이 서른 여섯 먹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것인가. 당시 서른 여섯이던 나의 아버지와 나는 손을 잡고 초등, 아니 국민학교 입학식에 갔던 기억이 났다.

실없는 푸념과 자기연민일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사회적, 경제적 출발선 마저 한참 뒤쳐져 있었다. 어찌저찌 학교 공부 포기 하지 않은 덕에, 알량하게 원장님 선생님 소리 듣고 살게는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감사할 일이긴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나도-  나도 평범한 사람이기에, 야구로 치자면 저기 3루에서 먼저 출발해 홈에 들어가 득점했노라며 의기양양한 친구, 동기들을 보며 시기 질투를 느낀 적도 많았더란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 나는 아직도 홈에서 헛스윙만 해대는 삼류 타자 아닐까 싶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지각인생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일에 스트레스를 받을 것을 미리 친구들을 통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사회에 나섰기에, 마음이 덜 아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덕에 여전히 내가 하고싶은 취미를 즐기고 책을 읽고 음악을 음미하고 미술을 사랑할 수 있다. 얼굴 찌푸릴 일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얼굴이 망가질 일도 그만큼 적어지게 된다.

인생 자체가 지각인생이니, 늙어가는 속도도 조금씩 느려지는 느낌마저 든다. 단순히 조금씩 친구들보다 '상대적인 동안'이 된다는 주관적이자 무형적 안도감도 감사할 일이지만, 아무튼 사회에 던져진 것이 늦으니 그만큼 정신적으로 노화되는 속도도 남들보다 늦어서 감사할 일이다.

다소 어렵게 학창시절 보냈다 하지만, 그래도 애시당초 가진게 너무 많아 잃을까봐 전전긍긍 걱정하는 것 보단, 내가 지켜낼 수 있고 내가 움켜쥘 수 있는 수준을 조금씩 쌓아가며 사는 재미도 없지는 않다. 누구보다는 늦은 자산의 형성이고 누구보다는 늦은 사회인으로서의 생활일진 몰라도. 지각인생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늙는 속도도 지각이니 감사할 일이다.

어리석게도 내가 지각인생이라 슬퍼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 바꿔보면 인생에 감사할 일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각인생이다.

앞으로도 계속 지각 하려 한다.

남들보다 덜 늙을 것이고, 조금 더 젊은 시절을 살아낼 것이다. 
특히 마음이 노화되어 쉬이 염세주의에 빠지고 자기연민에 사무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각인생이다.

앞으로도 계속, 쭉 지각 하려 한다.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