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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幻の光

오정민 감독, <장손>

by 이웃집박선생 2024. 10. 2.

 

* 9월 20일 / @광화문 시네큐브
1. 은근히 불편한 영화를 보았다. 보는 내가 불편했다는 것은, 감독이 의도하고 묻은 지뢰를 밟았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놈의 '장손'이란게 무엇인지. 또 그놈의 '전통'이란게 무엇인지. 세계 어디를 가나 장자 몰빵, 남아 선호 사상이라는게 없진 않지만, 우리 'K-장손'이 가지는 의미는 또 다르다.
2. 배우들 중엔 실제 부부인 배우가, 부부 역할로 출연하기도 하여, 연기 그 이상의 품격을 보여준다. 할머니 오말순 역할로 등장한 손숙 선생님의 연기는 정말로 우리 할머니(실제로 나의 할머니는 서울 마포에서 꽤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하시기도 했고, 경상북도 출신이셨다.)를 보는듯 했다. 은근히 관객을 울려볼까 말까 (억지 신파가 아닌,) 하다가도 하이퍼리얼리즘이란 말 조차도 아까운 유족과 그 주변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흐르지 못해 또 살짝 웃게 된다. 감독의 연출력에 경의를 표한다.
3. 할아버지 김승필 역할을 맡은 우상전 선생님의 연기 역시 일품이다. '그 세대'의 감성이 특히 묻어나는 일본어 독백 연기. 먼저 아내를 떠나보내고 아내의 무덤 앞에서 일본어로 독백을 한다. 실제로 일제강점기를 겪은 어르신들은, 어려서 우리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국어로서 교육받은 경험이 있다보니 자식들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당신들 끼리 나누실땐 일본어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걸 아내의 무덤 앞에서 독백 연기를 할 때 살렸다는데서 놀랐다.
4. 임권택 감독의 명작, 영화 <축제>와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축제>는 비교적 희극으로 끝이 난다 치지만, <장손>의 엔딩은 너무나도 쓸쓸하다. 특히 미장센의 수준이 탁월하다 못해 쓰디 쓴 한약재 고삼(苦蔘)을 씹는 느낌마저 든다. 작중 구미 김씨 가문이 운영하는 두부공장(대명식품) 근처의 갈림길에서, 원래 가던 길로 가려던 김 노인(김승필)은 돌연 다시 Y자 갈림길로 돌아와 아무도 지나지 않았던 눈길을 굽이굽이 돌아 들어 끝내 저 멀리 화면에서 사라진다. 노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관혼상제에 '철저'했던 구시대적 질서가 죽는 것일 수도 있고, 온갖 생각과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엔딩이었다. 소위 '매운맛', '자극적인 맛'의 영화는 아니었으나, '쓴맛'으로서는 괜찮은 2024년의 영화였다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5.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마도 나름대로 명문대에 진학했으나, 학생운동에 투신을 했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간간이 말 끝마다 "빨갱이"들을 말씀하시며, 극심한 적개심을 보인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다리를 저는 까닭은 아무래도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빨갱이 용공분자로 몰아 '고문'을 했을 수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학생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그저 '열심히' 살아온 것으로 -매우- 추측되는 주인공의 작은 아버지는 벤츠를 몰고 다니며, 자식을 해외 유학을 보낼 정도로 재력있는 사람이다. 주인공의 고모는 모종의 이유로 자식을 보지 못하여 조카인 주인공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고모부는 오랫동안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복잡한 속사정 가득한 집안이다. 여기서 두부공장, 즉 '가업'을 누가 잇느냐의 문제로도 갈등이 불거진다. 세상에 사연 없는 가족 어디 있겠냐마는, 영화 <장손> 속 주인공 가족들의 속사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그런데, 영화 밖 현실에는 이보다 더 복잡한 가족들도 허다하다.) 삼 대에 걸친 이야기에 칠정七情을 잘 버무려낸 감독의 능력에 경의를.
6. 이 작품에 대해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떠들 자신이 있으나, 여기엔 여백이 없어 적지 않겠다.... (기 보다는 정말 할 말이 많은데, 그냥 일단 글로는 여기까지)
 

2024.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