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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幻の光

시티시리 몽콜시리, <헝거 Hunger>

by 이웃집박선생 2024. 5. 20.

간간이 태국영화들 중 세계적 걸작이 나왔단건 익히 들어 알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그리고 본격적으로 '태국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가난한 자들은 배고픔hunger을 잊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은 더 다양한 것을 많이 먹기 위해 배고픔hunger을 일부러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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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한 문장이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 중 불세출의 셰프 '폴'의 지론이자 요리에 대해 가진 철학이다. 내가 언제나 영화에 대해 글을 쓸 때 그러하듯, 줄거리를 사사건건 읊는 행위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폴'이 요리에 대해 가진 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아주 잠깐 줄거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폴'은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캐비어 한 병 때문에 부유한 자들이 나에게 먹을것을 달라고 애걸복걸 할 수 있는 그런 셰프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캐비어 한 병 때문에 자기가 보는 앞에서 부유한 자들에게 어머니가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삼킨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요리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태국에서 알아주는 불세출의 파인 다이닝 전문 셰프가 된다. 

그의 레스토랑의 이름은 <헝거 HUNGER>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 '배고픔', '허기'다. 속이 비고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다. 부자도 빈자도 배가고프면 음식을 찾아 먹으려 든다. 그러나 평등한 부분은 거기 까지다. 부자의 식탁과 빈자의 식탁, 그리고 그 식탁 위에 올려진 무형의 '속성'은 다르다. 빈자는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해야만 살기 때문에 먹는다. 배고픔을 '잊기'위해 먹는다. 부자는 여유가 생길 수록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배고픔을 찾아 느낀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먹고, 누군가는 먹기 위해 산다. '폴'의 레스토랑의 이름은 이처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배고픔'을 그 이름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대하는 손님들은 다르다. '폴'을 찾는 손님들은 모두 부자들이다. 그러나 그런 부자들을 대하는 '폴'의 모습은 친절하고 사근함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나 차갑다. 저 사람이 과연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고 빈자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가난을 극도로 경멸한다. 그러나 부유함은 더욱 깊고 진하게 경멸한다. 그가 요리에 가진 철학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가 요리사가 된 동인(動因)이 바로 제아무리 부유하고 힘을 가진 이들 마저도 나의 요리를 먹기 위해 애걸복걸 하는 사람이 되어주겠다는 결심이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오이'는 가난한 태국식 볶음국수집 장녀였다. 웍을 다루는 솜씨, 그리고 볶음국수를 만들어내는 솜씨에 반한 <헝거>의 직원 덕분에 '폴'을 만나 <헝거>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오이'가 가난한 집의 딸임을 애써 영화 속에서 알려주려 들지 않더라도, 연출에서 이미 '폴'이 살고, 또 바라보는 세계. <헝거>가 대하는 고객들, 그리고 '오이' 가족이 머무는 공간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는 영화의 씬 하나 하나를 보면서 쉽게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폴'과 '오이'는 모두 훌륭한 자질을 갖춘 요리사이지만, 요리를 대하는 태도와 철학 역시 다르다는 것에 대해 영화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부하 요리사에게 인격 모독 수준의 독설을 퍼붓다가 옆구리에 칼을 찔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 '폴', 그리고 그를 스승으로서 존경한 '오이'와의 대화에서 이를 선명히 알 수 있게 된다. 음식에 사랑을 가득 담은 것은 그저 가난한 이들의 수사일 뿐이라 애써 비웃고 덮어버리려는 '폴'. 병원에서 주는 환자식 마저도 "내가 이런 쓰레기를 먹어야 하느냐!" 역정을 부리지만, 그러면서도 '오이'가 가져온 '가난의 상징물'과 다름 없는 볶음국수는 독설을 하면서도 잘 먹는다. '오이'의 요리사로서의 자질 만큼은 '폴'은 충분히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곧바로 이어 '폴'은 자신이 왜 요리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입을 연다. 그 역시도 가난에 절었던 삶을 살었다. 캐비어 한 병 때문에 어머니가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부잣집에서 갖은 수모를 겪는 것을 지켜본다. 그는 부유한 이들에 대한 뜨거운 복수심을 갖게 된다. 언젠간 부유한 자들이 나에게 밥을 달라고 애걸복걸할 그럴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그 꿈을 이루긴 한다. 그러다 그는 밀렵이 금지된 코뿔새를 가지고 요리를 하기까지 이른다. 그런 모습을 본 '폴'과 '오이'의 사제지간은 끝이 난다.

법과 윤리, 도덕을 넘어서까지 부유한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폴'을 찾아와 애걸복걸할 만한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는 '폴'의 욕심. '오이'는 그를 보고 사제관계를 끊고 홀로서기(*정확히는 '오이'의 요리 실력을 알아본 어느 후원자의 도움을 받기는 한다.)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부터 나는 어설픈 요리 대결 구도를 그리다가 장렬히 흥행에 실패한 여러 영화나 드라마 작품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영화 작품인 <식객>이 있다. 저렇게까지 경쟁 구도를 억지로 그려야 했을까 하는 정도로 오로지 요리를 통한 경쟁 구도, 그에 따르는 억지 흥미를 이끌어내는 노력만을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소비한 작품이었다. 어설픈 요리 경쟁 구도와 또 어설픈 선악구도로 주인공을 갈라치기하는 것이 아닐지 걱정하였으나 이내 그 걱정은 기우(杞憂)임을 깨달았고 안도하였다. 끝내 '오이'의 요리가 확고한 선택을 받게 되는 것을 보여주며, 영화 단순히 선함과 악함의 구도로 두 주연 배우를 배치한 것이 아닌, 결국 '먹는 행위'는 부자에게든 빈자에게든 다시금 '평등한' 것이며, 먹고난 이후 느끼는 '행복' 역시도 '어떤 것', '무엇'을 먹든간에 '평등한 것'임을. 

'부유한 자들'은 고상한 척, 배운 척, 있는 척 다 하지만 먹는 것 앞에서는 게걸스럽다. '폴'은 그들의 그런 모습을 즐긴다. 남의 살을 뜯고 피를 입에서 철철 흘리는 모습의 컨셉, 즉 문자 그대로의 사육제(카니발, Carvinal, 謝肉祭)를 열어 그들의 민낯을 드러내며 자기 어린 시절의 페이소스(pathos)를 뿜어낸다. 오직 최고의 음식을 위해서라면 법과 윤리, 도덕 마저도 자신의 아래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는, 그의 그런 생각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다. 자신의 제자이자 라이벌이 된 '오이'와의 대결 구도에서. '오이'는 분명 음식 대 음식으로서도, 요리사로서의 인성으로도 '승리'라는 것을 거머쥐기는 하나, 뭔가 석연치 않다. 뭔가 개운하지 않다. 오히려 눈물이 나온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영화가 마무리 된다. 후반부의 다소 어정쩡한 연출, 갑자기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와 부실한 연결고리 (e.g. 왜 갑자기 '오이'와 '폴'이 하나의 부잣집 파티에서 '경쟁'을 하게 되었는가. - 아마도 '오이'의 후원자가 미리 만들어낸 판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기 이전에 이야기 진행 속도가 갑자기 '급발진'하는 감을 나는 지금도 지우기 어렵다.)가 다소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음식'을, '요리'를 다룬 영화들 중,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연출."을 낸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난 이제부터는 바로 이 작품을 주저 없이 꼽을 생각이다.

최고(最高)의 명작(名作)은 아니었을지언정, 인간의 여러가지 본능 중, 식욕을 다룬 영화들 중 가장 맛있는 수작(秀作)이라 평하고 싶다. 그리고 끝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나는 이렇게 읽고 해석하였다. 살기 위해 먹든, 먹기 위해 살든.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픔(Hunger, 헝거)은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2024. 0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