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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幻の光

빔 밴더스, <퍼펙트 데이즈> 2회차. 그리고 야쿠쇼 코지의 무대인사.

by 이웃집박선생 2024. 7. 24.

1. 2024년 7월 21일, 아침 10시 10분.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일본의 명배우 야쿠쇼 코지를 만났다. 영화가 끝난 뒤의 씨네토크가 아닌 10여분 간의 무대인사로만 야쿠쇼 코지, 그리고 각본가인 타카사키 타쿠마, 제작 담당 야나이 코지씨를 만난건 상당히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학부시절 좋은 교양과목(* 평범한 대학 학부생에게 '좋은 교양과목'이란,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 수강신청도 제대로 못해본 내가 이런 예매는 또 기깔나게 잘 해낸 것에 대해 쓸데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이런 예쁜 쓰레기 같은 인생.

2. 어느 배우든 훌륭하지 않은 사람 없다지만, 일본 배우들 중 꿈에 그릴 정도로 동경하는 배우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야쿠쇼 코지를 꼽는다. 그 꿈에 그리던 사람을 눈 앞에서 만났다. 기분이 어땠겠는가? 말로 글로 다 표현 못하겠다. 정말이다. 내일 모레 칠순을 바라보는 할배인데 같은 남자가 봐도 너무 잘 생겼고, 목소리 좋고, 연기는 '신'神의 영역에 있다. 

3. 오후 씨네토크에서 두 거물 배우가 만났다. 야쿠쇼 코지, 그리고 송강호. 송강호는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야쿠쇼 코지는 작년, 바로 이 작품 <퍼펙트 데이즈>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수상작에 주연으로 출연한 것도 역시 인연이다. 송강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야쿠쇼 코지는 1997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에서. 단순하다 보기엔 꽤나 깊은 인연이다. 그래서 주최측에서 두 배우의 만남을 준비했을 것이다.

4. 이 영화엔 특별한 스토리가 없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도 사실상 없다. 그러기에 '스포일러'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다고 본다. 영화속 매일매일 뭔가 같게, 또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상황, 그리고 주인공이 잠들고 일어나서의 상황 속의 변주. 여기서 홍상수 감독의 영향이 조금 있지 않았나 싶었는데, '명시적'으로 그렇다고 말하진 않았으나 오늘 무대인사에서 각본을 맡은 타카사키상이 홍상수 감독을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제일 먼저 언급하기는 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어쩌면 나 혼자 느끼는 것일 수 있었는데, 각본가의 말에서 아주 약간은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한건 아니었구나.'하는 쓸데없는 위안을 느끼긴 했다. 이런 예쁜 쓰레기같은 나의 사고 회로.

5. 무언가 자극적인 것을 위해 이 영화를 찾지 않기를 바란다. 무언가 특별한 맛을 보기 위해 이 영화를 찾지 않기를 바란다. 솔직히 이 영화는 어쩌면 졸릴 수도 있겠는데, 그냥 보다가 스르르 잠들어도 좋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재미가 없고, 작품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관객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졸았다는 것은 아니다.

6. 두 번째 관람을 하고 나니, 은근슬쩍 피식 피식 웃게 된다. 숨겨진 재미 코드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엄청난 명대사가 들어있다 보기도 애매하나, ("나중은 나중, 지금은 지금.", "이 세상은 수 많은 세계~"어쩌구 등) 배우들의 표정, 몸짓 그 자체와 그저 스크린에 비추어지는 도쿄의 여러 모습 그 자체가 말 그대로 영화가 된다. 주연 야쿠쇼 코지의 대사를 모두 다 써서 늘어놔보면 과연 몇 문장이나 될까? 그런데 세계적인 명배우는 입을 열어 음성 언어를 내지 않고도 명연기를 펼친다. 그러면서도 보는 이들 마저 흐뭇하게 하는,

7. 주연 야쿠쇼 코지가 맡은 '히라야마'(平山라 쓰는 것으로 추정됨)는 마냥 소중한 일상을 지켜낸다는 흐뭇함만을 보이진 않는다. 자극적이고 명시적이며, 화끈하고 시원하게 나오지 않을지언정 이 영화 안엔 주연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은은하고 엷게 녹아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에겐 변함없는, 그러나 매우 절제된 애정을 보이고, 혼자서만 독박 업무를 해야만 할 땐 은근히 성질을 부리기도 하고, 은근히 관심을 갖고 있던 단골집 여사장의 모습을 보고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사서 피우고 술을 마시며 잠시 심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8. 영화 막바지. 엔딩에서 니나 시몬Nina Simone "Feeling Good"이 배경 음악으로 울려펴지며 보여주는 야쿠쇼 코지의 명품 표정연기는 이미 나에겐 올해 최고였다. 이미 정성일 평론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당신은 야쿠쇼 코지와 똑같은 표정을 따라 지으면서 이 장면을 끝내지 말아 달라고 스크린을 향해 몇 번이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는 평가를 남긴 바 있다. 가슴 깊이 동의하는 그의 문장이다. 지금 이대로의 소중한 삶이 깨지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뭐지, 이 표정연기는.

9. 엔딩 크레딧이 꽤 길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을 반드시 다 보고, 마지막 빔 밴더스 감독이 관객에게 남긴 메시지까지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자. 이 영화의 각본가 타카사키 타쿠마상이 '대놓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빔 밴더스 감독이, 그리고 자기 자신도 끝까지 꼭 봐주었으면 한다고.

10. 그러면서 'N회차 관람'을 해주시기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고나서 쑥쓰럽게 웃으신다. 은근히 귀염스러웠다. 그렇지만 곧 우리나라의 극장가에선 이 영화가 곧 내려갈 것 같다. 앞에서 웃다가 뒤에서 울게 된다.

11. 매일매일의 '루틴'이란게 있어 지루할 수 있겠으나, 그 안에서 은근히 다양한 모습이 보여진다. 이건 우리들의 삶도 비스무리 할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지겹고 힘든가?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잠시 '쉬어'가시기를 부탁드리고 추천드린다. 덕분에 나 역시도 매일 아침 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출근하게 된다. 매일 짜증스럽고 지치는 일상은 계속 되겠지만, 그 마저도 소중하다는 것을 매일매일, 다시금 떠올리며 현관을 나선다. 너의 하루도 나의 하루도, 우리 모두의 하루도 모두 완벽한 하루다. '퍼펙트 데이'들이다. -퍼펙트 데이즈-

12. 루 리드Lou Reed의 "Perfect Day"라는 음악이 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이다. 조곤조곤 속삭이는듯 하다 지르는 노래를 부르지만 결코 매운맛의 노래는 아니다. 가사도 매우 단순하다.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니 '완벽한 날'이란 소리다. 마지막 반복되는 "심은대로 거둘거에요."라는 말도, 뭐 별 뜻이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 충실하니 완벽한 날이란 뜻이고, 지금 하루에 충실하니 그 날이 완벽한 날이란 의미겠지.

 

2024. 7. 21. @광화문 시네큐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