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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幻の光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by Fred.Park 2024. 3. 15.

 

"괴물은 누--구게?"

 

※ 4월 11일 업데이트 : 곧 '개정' 내지는 처음부터 다시 쓸 예정. 그만큼 '애정을 가진' 영화 작품이라서.

#0 - 열치매,

나는 전문 영화평론가가 아니다. 영화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하다. 영화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할 수준의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이 부족하다. 기계적이고 영혼없는 겸손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를 철저히 알고 말을 해야 하는것이 기본이지만, 그에 대한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를 내어보려 한다. 무언가에 대해 '쓴다'는 것은 그 무언가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 더 나아가 애정이 있기 때문에 그 무언가를 쓰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차갑고 날선 언어로 비판과 혹평을 내리는 것도 결국 관심이 있으니 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나는 차갑고 날선 언어가 아닌 애정을 담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련다.

#1

일본의 어느 중소도시. 영화는 불타는 건물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윽고 붉은 글씨로 영화의 제목이 등장한다. '괴물'怪物. 붉은 글씨로 스크린의 대부분을 채우는 이 타이틀에서부터 우리는 기괴함을 느끼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큼지막한 글씨로, 불타는 건물을 배경으로, 그것도 붉은 글씨로 눈 앞에 나타나는 '괴물'이란 글자. 여기서부터 감독은 관객을 놀리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괴물'이라는 제목의 영화는 이미 우리에겐 꽤나 익숙하다. 이미 봉준호 감독의 작품 중 동명의 영화는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같은 이름의 영화가 이미 오래전 나왔다는 것도 영화 팬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 작품이 아닌 다른 동명의 영화 <괴물>들에서는 정말로 '괴물'이 등장한다. 우리는 그렇게 영화를 보면서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렇게 괴물을 찾기 시작한다. 

이미 많은 해설, 평론등을 통해 이 영화의 줄거리는 잘 알려진 바 있으니 여기서는 줄거리를 세세하게 풀지 않으려 한다. 다만 우리는 엄마 - 호리 선생을 거쳐 결국 주인공 미나토와 요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두고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오해에서 이해에 이른다'고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괴물이 누구인지 그토록 찾으려 애쓰던 관객들은 여러 번의 뒤통수를 맞고, 결국 괴물을 찾으려 했던 우리가 괴물인가? 하는 자기 반성과 성찰을 시작한다. 헌데 이 영화의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는 특별히 다른 영화에 비해 영화 중간중간에 담겨있는 해석할 '꺼리'가 아주 많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특히나 이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 2 - 불, 그리고 물에 대한 이야기.

'불'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시작부터 불타는 건물이 나온다. 거기서 빨간 글자로 영화의 제목이 큰 글씨로 등장한다. 이 제목의 표시부터가 뭔가 기괴하여, 그 자체를 괴물이라 생각할 정도였달까. 이어서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죽은 이(미나토의 아버지)는 '화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요리가 죽은 고양이를 '불태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결국 요리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겠다며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가 자주 다니는 걸스바(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모던바)가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른다. 여기서 '불'은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장치이다. 멀쩡하던 건물, 그 건물 3층의 걸스바를 '없애버렸'다. '불륜여행'을 떠나다 사고로 죽은 미나토의 아버지의 육신을 태워 '사라지게' 하는 '화장'이었다. 요리는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불태워 없애려 한다. 영화 첫 장면의 화재는 매우 맹렬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속에서 새벽 늦게까지 화재가 진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몇 시에 잠들었어? 난 새벽 1시. - 그 때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불이 '맹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 천천히 '물'에 대한 이야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일본 나가노현의 스와諏訪라는 중소도시이다. 이곳은 스와호諏訪湖라는 거대한 호수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이다. 불타는 건물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가 간간이 넓은 호수를 보여준다. 호수는 말 그대로 '물'이 모인 곳이다. 때때로 영화는 호수에서 하천으로 흘러가는 수문(실제 이름은 가마구치수문釜口水門)을 보여준다. 이후 조금씩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하며 도시 전체에 폭풍이 몰아치고 비가 내린다. 호수에서 하천으로 물을 내보내는 수문의 물도 거칠게 흐르기 시작한다. 폭풍은 술을 사들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요리의 주정뱅이 아빠도 넘어뜨릴 정도로 맹렬했다. 폭풍은 산사태까지 일으키며 미나토와 요리의 아지트인 폐전철을 덮친다. 미나토의 엄마와 호리선생은 아이들을 구출하러 (정확히는 미나토를 찾으러,)가지만 아이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자신의 실수로 손녀를 사고로 죽게 만든, 그러나 현직 소학교(초등학교) 교장이자 직위가 높은 공무원이라는 입장 등으로 남편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 교장 역시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비를 맞는다. 

참. 이 영화 속에서의 ‘물’에 대해 빼놓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고양이의 시체를 불태워 없애려는 요리, 시체가 불타 없어지면 죽은 고양이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미나토는 곧바로 '물'을 담아와 뿌려 '불'을 끈다. 죽은 자기의 아버지를 생각해서였을까? 미나토는 영화 내내 간간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언급한다. 불에 타 흔적조차 남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 미나토의 마음을 동動하게 했던 셈이다. 그리고 미나토는 요리에게 묻는다. "걸스바 건물 불, 네가 그런거지?" - 요리는 대답한다. "술은 몸에 나쁘잖아."(상습적으로 걸스바에 가서 술을 마셔대는 주정뱅이는 호리 선생이 아닌, 다름아닌 요리의 아빠였다.) 간접적으로 시인한다. '불'의 원인은 바로 요리였다. 모든것을 태워 없애고, 맹렬한 '불'. 이는 어쩌면 동성애적 성적 지향성을 가지기 시작한 요리를 이해하지 못한 세상, 더 가까이는 '돼지의 뇌'를 치료해주겠노라며 갖은 폭력을 행사한 아빠에 대한 분노이자 저항이었으리라.

헌데 미나토湊는 '물'의 역할을 자처한다. 고양이의 시체가 모두 타 없어지기 전에 '물'을 뿌려 '불'을 끈다. 미나토의 이름에 쓰인 湊라는 한자는 '물의 모임'을 의미한다. 보통 '미나토'는 일본어로 항구, 공항과 같은 것을 의미하며, 이런 경우 보통 항구 항港자를 사용한다. 헌데 미나토의 이름을 일부러 물모일 주湊를 사용한데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요리는 '불'이고, 미나토는 '물'이다. 미나토가 아니었다면 요리의 '불', 세상을 향한 분노는 누가 끌 수 있었을까? 또한 '물'의 속성을 더 깊이 생각해보자. 물은 '정화'淨化의 의미를 갖는다. 온갖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 우리도 매일매일 '물'로 손을 씻고 샤워를 하며 우리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지 않는가? '물'의 속성은 바로 '씻어냄'이다. 미나토는 요리를 진정시키고 정화시킨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고 물고문을 하여 욕조에서 정신을 잃게 만드는 그 ‘물’과는 다른, 미나토湊. 

물론 영화 속에서 ‘물’은 폭풍우로서의 모습으로 산사태를 일으키기도 한다. '물'에 의해 무너진 흙더미는 미나토와 요리의 아지트인 폐전철을 덮친다. 이는 주인공 아이들 둘의 얼굴에 흙이 묻도록 한 원인이 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 속 대화가 있다. "얼굴에 흙을 뿌렸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미나토는 아빠가 돌아가실때 얼굴에 흙을 뿌렸느냐 엄마에게 묻는다. 화장을 했으니 그럴리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리고 또 이어 묻는다. 아빠는 다시 태어났을까? 하고. 그리고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하고. '흙'은 말 그대로 땅을 의미한다. 우리 한국어에서의 '흙으로 돌아가다'는 죽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본어로도 '흙으로 돌아가다土に帰る'는 말은 죽었다는 말을 돌려 표현한 것이다. 

다만 이 말의 한국과 일본에서의 의미는 미묘하게 다르다. 토장土葬또는 매장埋葬이 주가 되었던 우리의 장례문화에서는 땅속에 사람의 시신을 묻는것을 의미하고, 화장火葬이 주가 되는 일본의 장례문화에서는 뼛가루와 재가 되어 흙의 형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묻히는 시신은 얼굴에 흙이 묻을 수 있지만, 한 줌의 재가 되어 형상이 사라진 죽은 이는 얼굴에 흙을 묻을 수가 없다. 미나토의 생각으로는 얼굴에 흙이 묻을 수 있는 죽은 이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반대로 육신이 사라져버리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도 믿는 것 같다. 그러게 물에 의해 세상도 씻겨지고 두 아이를 둘러싼 갈등도 일견은 해소되며 세상 누구보다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내며 '빛'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 즉 '물'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폐선로에 있었던 장애물, 폐철교로 들어가는 길을 막던 펜스는 더이상 없다. 아이들 둘은 폐선로를 향해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언제나 '빛'을 이용하는 방식 대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밝은 빛이 오버랩되는 장면이 아주 잠깐 지나간 후 영화는 마무리된다. 사실 아이들 둘이 완벽히 폐전철을 빠져나갔는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아이들 둘 모두가 산사태에 의해 사망하게 된 것인지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해석이 분분할 수 있다고 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이동진 평론가와의 대담에서는 이 아이들 둘은 ‘사망’한 것이 아니라 밝혔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처음 본 날, 폐선로와 폐철교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오열’嗚咽하였다. 헌데 이 오열은 또 그저 그런 슬픔으로 기인한 것이 아닌, 엔딩 속의 ‘빛’을 보고 느끼는 환희이었기도 해서 부족한 내 언어적 능력으로 표현할 길이 없음에, 그저 지금은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명작 영화를 그저 명작이라 일컫는 것에서도 많은 용기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2024. 03. 15.